
☐ 비 오는 날 카카오 T를 켜면 배차가 안 됩니다. 같은 시간 같은 자리인데 유독 비 오는 날만 그렇습니다. 수요가 몰려서 그렇겠거니 했는데 어느 책에서 다른 설명을 읽고 꽤 그럴 듯 하다고 생각했습니다.
그럴듯한 설명
“뉴욕의 택시 기사들은 열두 시간 교대로 차량을 임차하며, 보통 임차료의 두 배를 하루 목표액으로 정한다. 비가 올 때는 그 목표액이 훨씬 빨리 채워지므로 더 일찍 집에 돌아가는 것이다.”
- “합리적행복”, “올리버 버크먼”
☐ 이 설명의 묘미는 아이러니에 있습니다.
- 손님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택시가 사라지는데, 그 이유가 바로 손님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죠.
“하필이면 비가 올 때 목표를 일찍 채워 여유시간을 누린다는 데 있다.”
- “합리적행복”, “올리버 버크먼”
☐ 이 이야기의 출처는 1997년 카머러·배브콕·로웬스틴·세일러의 논문입니다.
- 행동 경제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연구고, 이후 20년 가까이 “인간은 목표 소득을 정해 두고 거기에 맞춰 일한다”는 사례로 수없이 인용됐습니다.
- 리처드 세일러가 공저자라는 점만 봐도 이 이야기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.
그런데 좀 이상합니다
☐ 읽으면서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.
- 비 오는 날 손님이 많다면 기사 입장에서는 돈 벌기 좋은 날 아닌가요?
- 그런 날일수록 더 오래 일해서 더 버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?
- 목표 소득만 채우고 퇴근하는 건 사실 손해 보는 전략입니다.
- 잘 걸리는 날 일찍 접고 안 벌리는 날 늦게까지 붙어 있는 셈이니까요.
- 같은 돈을 더 오래 일해서 버는 구조입니다.
- 그래서 이 이론은 ‘사람이 얼마나 비합리적인가’를 보여주는 사례로 쓰여졌습니다.
☐ 전 여기서 두 번째 의문이 들었습니다.
- “정말 그럴까?”
- “혹시 비 오는 날 운전이 힘들어서 안전때문에 안 나오는 건 아닐까?”
데이터로 다시 보니
☐ 2015년 프린스턴대의 헨리 파버가 같은 질문을 놓고 훨씬 큰 데이터를 들여다봤습니다.
- 논문 제목이 아예 비 오는 날 택시를 잡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.
- 1997년 연구가 쓴 자료는 손으로 쓴 은행일지 몇 백 장이었습니다.
- 파버는 2009년에서 2013년 뉴욕 택시의 전자 운행 기록 전체에서 표본을 뽑았습니다.
- 기사 8802명, 운행기록 1억1천만 건 이상입니다.
☐ 여기에 센트럴 파크의 시간별 강수 기록을 붙여서 5년치 매 시간마다 비가 왔는지와 시장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대조했습니다.
☐ 결과는 이렇습니다.
☐ 시간당 수입 사실상 차이 없음.
- 비가 온다고 기사들이 더 벌지 않았습니다.
☐ 승객을 태우고 있던 시간 - 약 4.8% 증가
- 수요가 늘어난 건 사실입니다.
- 빈 차로 돌아다니는 시간이 줄었습니다.
☐ 승객을 태우고 달린 거리 - 약 2.4% 감소
- 길이 막히고 운전이 어려워지니 같은 시간에 덜 갑니다.
☐ 도로 위에 택시 대수 - 약 7.1% 감소
- 공급이 줄어든 것도 사실 사실입니다.
☐ 손님은 더 잘 잡히는데 차가 안 나가니 결국 버는 돈은 그대로입니다.
- 늘어난 수요를 막히는 도로가 정확히 상쇄해 버린 겁니다.
- 그렇다면 목표 소득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습니다.
- 일찍 채울 목표액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.
- 비 온다고 더 벌리지 않는데 목표를 일찍 채울 방법이 없죠.
그러면 왜 택시는 사라질까?
☐ 7.1%가 줄어든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.
- 목표 소득 때문이 아니라 파버의 설명은 훨씬 단순합니다.
- 비 오는 날은 운전은 더 피곤하고 더 위험하고 덜 즐겁습니다.
- 그런데 그 대가로 더 벌리지도 않습니다.
- 힘은 더 드는데 보상은 그대로면 안 나가는 게 맞습니다.
- 목표를 채워서 집에 가는 게 아니라 애초에 나올 이유가 없어서 안 나오는 겁니다.
☐ 파버는 논문 말미에 해법도 한 줄 덧붙였습니다.
- 비 올 때 요금을 올려서 기사들이 나올 이유를 만들어 주면 된다.
- 우버의 탄력 요금제가 그렇습니다.
- 그런데 우리나라는 날씨에 따라 택시요금이 달라지지는 않죠.
- 대신 비슷한 실험은 이미 있었습니다.
- 2022년 심야 승차난이 심해지자 정부는 심야 호출료를 최대 5,000원까지 올렸고, 그해 12월 수도권 심야 시간대에 나온 기사 수가 6월보다 11.4% 늘었습니다.
- 값을 올리니 기사가 나왔습니다.
- 비 오는 날에는 아직 그런 장치가 없습니다.
남는 질문
☐ 사실 확인을 끝내고 나서 마음에 남은 건 택시가 아니었습니다.
- 저는 왜 그 설명에 그렇게 쉽게 설득됐을까요?
- 답은 알 것 같습니다.
- 그 이야기가 훨씬 재밌었기 때문입니다.
- ‘손님이 많아서 택시가 사라진다’는 역설은 그럴듯하고 재미있습니다.
- ‘길이 막혀서 수입이 그대로라 안 나간다.’는 건 썩 재미있지 않습니다.
☐ 노벨상 수상자가 쓴 논문이었고, 유명한 책에 실려 있었고, 무엇보다 제 상식을 뒤집는 통쾌함이 있었습니다.
- 검증할 이유를 찾기 어려운 조건이 다 모여 있었던 거죠.
- 다행히 이번엔 걸리는 게 있어서 찾아봤지만 걸리지 않고 지나간 이야기들은 지금 제 머릿속에 몇 개나 들어가 있을까요?
☐ 재미있는 설명일수록 한 번 더 의심해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거 같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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