
☐ 저는 쏘카를 자주 이용합니다.
- 매번 같은 차를 빌리는 것도 아니라서, 그때그때 차종을 바꿔 가며 타는 편입니다.
- 제조사가 바뀌면 인터페이스가 통째로 달라지고 버튼 위치도 달라서
- 늘 조금씩 헤맵니다.
☐ 처음에는 낯선 차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.
- 물론 제조사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합니다.
- 그런데 몇 번 반복해보니 차에 따라 헤매는 정도가 달랐습니다.
- 공조 조작계가 화면 아래 물리 버튼으로 남아 있는 차는 처음 타도 손이 금방 갔습니다.
- 큼직한 다이얼을 돌리거나 버튼을 누르면 되니까요.
- 하지만 화면 안으로 들어가 있는 버튼은 직관적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었습니다.
☐ 문제는 그 헤매는 순간이 대체로 출발한 뒤라는 겁니다.
- 주차장에서는 별 생각 없이 시동을 걸고 나옵니다.
- 그러다 창에 김이 서리거나 히터가 너무 세거나 라디오 소리가 크다는 걸 도로 위에서 깨닫습니다.
- 그때부터 화면을 켜고 메뉴를 찾고 아이콘을 누르고 잘못 눌러서 다시 뒤로 갑니다.
- 그 사이에도 차는 계속 달리고 있습니다.
- 생각보다 위험하죠.
- 헤매는 그 몇 초 동안, 제 눈은 도로에 없습니다.
‘터치’라는 이름의 함정
☐ 터치스크린이라는 이름에는 묘한 역설이 있습니다.
- 이름에는 ‘만진다’가 들어가 있지만, 실제로는 만져서 얻는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.
☐ 물리 버튼은 다릅니다.
- 손을 뻗으면 손끝이 먼저 정보를 줍니다.
- 볼록한 다이얼인지, 납작한 스위치인지, 이미 눌려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.
- 운전자가 앞을 보면서 라디오 볼륨들을 줄일 수 있었던 건
- 손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손이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조작 장치가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.
☐ 반면 터치 스크린은 평평한 유리입니다.
- 위치도 상태도 경계도 손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.
- 그래서 조작을 하려면 반드시 눈을 써야 합니다.
- 시선을 도로에서 떼야만 쓸 수 있는 장치가 운전석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셈입니다.
- 여기서 중요한 건 시선을 떼는 시간이 생각보다 비싸다는 점입니다.
- 미국 자동차 협회의 연구에 따르면 도로에서 눈을 2초만 때도 충돌 위험은 두 배가 됩니다.
- 2초는 우리가 잠깐이라고 부르는 시간입니다.
몇 번 쓰면 몸이 기억합니다
☐ 물리 버튼의 진짜 강점은 처음 쓸 때가 아니라 열 번째 했을 때 드러납니다.
☐ 같은 조작을 몇 번 반복하면 우리는 그 위치를 몸으로 기억합니다.
- 심리학에서는 이걸 절차 기억이라고 부릅니다.
- 자전거 타기 타자 치기 계단 내려가기처럼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아도
- 몸이 알아서 하는 종류의 기억입니다.
- 이 기억의 특징은 의식적인 주의를 거의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.
- 그래서 자전거를 타면서 대화를 할 수 있고 타자를 치면서 다음 문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.
☐ 옛날 차의 조작계는 이 기억이 쌓이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.
- 온도 다이얼은 늘 그 자리에 늘 같은 모양으로 있었습니다.
- 그래서 한 달쯤이면 손이 알아서 갔고 그동안 눈은 계속 도로를 보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.
☐ 터치 스크린에서는 이 축적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.
- 위치를 외웠다고 해도 손끝이 확인해 주지 않으니 결국 한 번은 봐야 합니다.
- 게다가 그 화면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배치가 바뀌기도 하고
- 모드에 따라 같은 자리에 다른 버튼이 뜨기도 합니다.
- 몸에 쌓인 기억을 못 쓰게 만드는 설계인 셈입니다.
-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오래 타도 매번 처음처럼 눈으로 찾아야 합니다.
- 자기 차를 오래 타면 결국 익숙해질 수도 있지만
- 여전히 터치 인터페이스에서는 눈이 한번 가야합니다.
자동차는 생각보다 많이 흔들립니다
☐ 우리가 잘 의식하지 못하는 조건이 하나 하나 더 있습니다.
- 터치 스크린은 원래 스마트폰에서 왔습니다.
- 그런데 스마트폰을 쓸 때 우리는 대체로 앉아 있거나 서 있습니다.
- 손과 함께 화면이 함께 흔들리지 않는 환경입니다.
☐ 자동차는 다릅니다.
- 서스펜션이 아무리 좋아도 노면의 요철과 코너의 횡 가속도는 몸에 전달됩니다.
- 게다가 손을 화면 쪽으로 뻗는 순간 몸을 지탱하던 발이 허공에 뜹니다.
- 그 상태에서 차가 한 번 튀면 손끝은 겨냥하던 곳에서 벗어납니다.
- 실험으로도 확인된 사실입니다.
- 방지턱 같은 노면 유철이 터치 정확도를 19%까지 떨어뜨린다는 연구가 있고
- 실제 도로를 달리는 차량에서 측정한 연구에서도
- 진동과 횡가속도 때문에 선택 실패가 늘어난다는 게 확인되었습니다.
- 한번 빗나가면 다시 봐야 합니다. 잘못 눌렀으면 되돌려야 합니다.
- 시선이 도로를 떠나는 시간은 한 번에 끝나지 않고 두 번 세 번으로 늘어납니다.
- 물리 버튼은 이 문제에서 훨씬 자유롭습니다.
- 손가락이 버튼 주변에 굴곡을 더듬을 수 있고 손목을 어딘가에 걸쳐 몸을 지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.
유럽은 규칙을 바꿨습니다
☐ 이 문제를 제도로 바루기 시작한 곳이 유럽입니다.
- 유로 NCAP라는 유럽의 신차 안전도 평가 프로그램에서
- 인간-기계 인터페이스 평가 항목이 새로 들어갔고
- 방향지시등, 비상등, 경적, 와이퍼, 긴급통화 같은 필수 기능은
- 직접적인 물리 조작이 가능해야 최고 등급을 받는데 유리합니다.
☐ 그런데 제조사들이 왜 계속 화면을 키우고 버튼을 만드냐면
- 화면이 싸기 때문입니다.
- 버튼 하나에는 금형과 스위치와 배선과 조립 공정이 붙습니다.
- 기능이 20개면 부품도 20 종입니다.
- 화면에 한 하나에 다 넣으면 부품은 하나입니다.
- 게다가 출고 후에도 소프트웨어로 기능을 바꾸거나 팔 수 있습니다.
☐ 우리는 운전 중에 휴대전화를 만지는 걸 명백한 위험 행동으로 여깁니다.
- 도로 교통법상 금지돼 있고 범칙금과 벌점도 붙습니다.
- 그런데 똑같은 행위를 대시보드에 붙어 있는 화면에 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.
☐ 두 행위의 인지적 구조는 사실상 같습니다.
- 시선을 도로에서 뗀다,
- 평평한 유리 위에서 목표를 눈으로 찾는다,
- 흔들리는 환경에서 정확히 누른다,
- 잘못 눌렀는지 확인하려고 한 번 더 본다.
- 좀 이상하죠?
마치며
☐ 우리 몸은 40년 만에 바뀌지 않습니다.
- 좋은 설계란 사람을 기계에 맞추는 게 아니라, 기계를 사람에게 맞추는 일인 것 같습니다.
- 원가와 편의사항보다 안전이 더 중요하다면
- 기업의 논리가 아닌 제도의 논리로
- 안전을 지킬 수 있게 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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