
지난 글에 달린 댓글을 보고 좋은 글감이라고 생각해서 써봅니다.
☐ Zero To One에서 Thiel은 서사적 오류에 빠져있었고
- 잡스는 아이팟 개발 당시 아이폰은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라고 읽은 기억이 난다는 말이었습니다.
☐ 제 글은 2004년에 잡스가 아이폰 만들기를 반대했다는 이야기였는데
- 댓글을 쓰신 분은 같은 사건이 다른 책에서 정반대로 서술되어 있다는 걸 기억해내신 겁니다.
틸이 쓴 이야기
☐ 피터 틸의 “제로 투 원”에는 스티브 잡스를 다루는 대목이 있습니다.
☐ 잡스에게 배울 가장 중요한 것은 디자인 감각이 아니라 사업을 설계하는 방식이다.
☐ 애플은 “definite multi-year plans”, 그러니까 명확한 다년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행했다.
☐ 아이팟은 그 자체로 끝나는 제품이 아니라, PC 이후 시대를 겨냥한 휴대기기 세대의 첫 제품으로 처음부터 계획딘 것이었고, 대부분의 사람은 그 사실을 보지 못했다.
☐ 틸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목적은 분명합니다.
- 요즘 창업 세계가 신봉하는 ‘최소 기능 제품(MVP)’과 ‘빠른 반복’을 반박하기 위해서입니다.
- 고객 반응을 들으며 조금씩 고쳐 나가는 방식으로는 0에서 1로 갈 수 없고
- 큰 계획을 먼저 세운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죠.
- 그 증거로 아이팟 → 아이폰 → 아이패드로 이어진 애플의 10년이 제시됩니다.
- 읽으면 설득력이 있습니다.
- 실제로 그 순서대로 나왔으니까요.
그 10년 사이에 실제로 있었던 일
☐ 문제는 그 사이에 벌어진 일들입니다.
☐ 2004년, 엔지니어와 마케터로 구성된 팀이 잡스에게 아이팟을 전화기로 만들자고 제안합니다.
- 잡스는 거절합니다.
- 통신사와 일하기 싫다는 것, 그리고 자신이 여러 번 공개적으로 “전화기는 안 만든다”라고 말해 왔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.
☐ 같은 해 7월 애플은 모토로라와 제휴를 발표합니다.
- 아이튠즈를 모토로라 휴대폰에 넣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.
- 직접 만들지 않고 남에게 맡기기로 한 겁니다.
☐ 2005년 9월, 그 결과물인 모토로라 ROKR E1이 공개됩니다.
- 기존 모델에 아이튠즈 버튼을 하나 붙인 물건이었고, 저장 가능한 곡 수는 100곡으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.
- 무대에 선 잡스 본인이 이걸 “an iPod shuffle right on your phone”이라고 소개했습니다.
☐ 그리고 같은 행사에서, 잡스는 아이팟 나노를 함께 공개했습니다.
- 청바지 작은 주머니를 가리키며 “이 주머니가 왜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?”라고 물었던 그 발표입니다.
☐ 한 무대 위에 회사의 미래를 남에게 맡긴 제품과, 회사가 직접 만든 제품이 나란히 놓였습니다.
- ROKR은 실패했고 제휴는 1년 만에 끝났습니다.
- 아이폰은 그로부터 다시 1년 4개월 뒤에 나옵니다.
☐ 10년을 멀리서 보면 계획으로 보입니다.
-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거절과 외주와 실패한 제휴가 있습니다.
서사적 오류
☐ 나심 탈레브가 “블랙 스완”에서 쓴 표현입니다.
- 우리는 사실의 나열을 그대로 기억하지 못하고, 반드시 앞뒤를 인과로 이어붙여 이야기로 만든 뒤에 저장합니다.
- 이야기는 기억하기 쉽고, 나열은 기억하기 어려우니까요.
☐ 그래서 결과를 알고 난 뒤 과거를 돌아보면, 결과로 이어진 선들만 유난히 선명하게 보입니다.
- 아이팟과 아이폰 사이에는 실제로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아이폰이 나온 다음부터는 아이폰으로 이어진 길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지워집니다.
- 모토로라와의 2년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.
- 틸이 거짓말을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.
- 저는 그가 성실하게 썼다고 생각합니다.
- 다만 그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 10년을 보면, 누구에게나 계획으로 보입니다.
☐ ‘방향이 있었다’와 ‘계획이 있었다’ 이 둘은 다릅니다.
☐ 방향은 “휴대기기가 PC를 대체할 것이다”정도의 감각입니다.
- 틀릴 수도 있고, 맞아도 언제 어떤 형태로 올지 모릅니다.
☐ 계획은 “2007년에 전화기를 내겠다”는 일정표입니다.
- 잡스에게 이건 없었습니다.
- 있었다면 2004년 팀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도, 모토로라에 맡길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.
☐ 틸은 사실을 지어낸 게 아니라 이름을 바꿔 붙인 쪽에 가깝습니다.
- 방향 감각을 계획으로 바꿔 부른 겁니다.
☐ 방향 감각이 있었다는 말은 나중에 맞다 틀리다를 따지기 어렵습니다.
- 반면 계획이 있었다고 말하는 순간, 일정과 순서와 목표 제품이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.
- 이건 증거를 대야 하는 주장입니다.
- 그런데 틸이 증거로 내미는 것은 결과뿐입니다.
- 아이팟 다음에 아이폰이 나왔으니 계획이었다는 거죠.
☐ 단어 하나가 슬쩍 격상되면서, 원래는 증명해야 할 주장이 증명 없이 통과됩니다.
한국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
☐ 오징어 게임의 깐부 할아버지, 오영수 배우 이야기입니다.
- 1960년대부터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해 200편이 넘는 연극에 출연했습니다.
- 1987년부터 2010년까지 23년간 국립극단 단원으로 있었고, 동아연극상과 백상예술대상 연기상도 받았습니다.
- 그러니 무명이었다고 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.
- 연극계에서는 이미 관록을 인정받는 배우였습니다.
- 다만 대중에게, 특히 한국 밖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.
☐ 2022년 1월, 78세에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받습니다.
- 한국 국적 배우로는 처음이었습니다.
- 수상 직후 쏟아진 이야기는 대체로 하나였습니다.
- 반세기 넘게 무대를 지킨 사람이 마침내 보상받았다는 것.
- 저도 그때 그렇게 읽었습니다.
☐ 그런데 정작 본인이 한 말은 결이 좀 다릅니다.
“처음부터 연극이 재미있었던 건 아니다. 하다 보니 재미가 있었고, 그렇게 흘러가게 된 것”
☐ 흘러가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.
- 버텼다거나 지켰다는 표현이 아닙니다.
☐ 만약 오징어 게임 캐스팅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?
- 55년은 그대로 있습니다.
- 200편도 그대로고, 국립극단의 23년도 그대로입니다.
- 달라지는 건 하나뿐입니다.
- 그 세월이 성공기로 불리지 않는다는 것.
- 조용히 은퇴하고 대학로 사람들만 기억하는 이름으로 남았을 겁니다.
☐ 그리고 실제로는 그런 사례가 훨씬 많을 겁니다.
- 같은 시기에 같은 무대에 서고, 같은 가난을 견디고, 같은 성실함으로 산 배우가 수백 명입니다.
☐ 그중 Netflix에서 전화를 받은 사람이 한 명이었을 뿐입니다.
- 우리는 그 한 명의 인생만 이야기로 만들고, 나머지는 이야기가 되지 않아서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룹니다.
☐ 잡스 이야기와 오영수 이야기는 언뜻 반대편에 있어 보입니다.
- 하나는 “치밀하게 계획했다”는 서사이고 다른 하나는 “묵묵히 버티면 보상받는다”는 서사니까요.
- 그런데 만들어지는 방식은 같습니다.
- 결말이 먼저 정해지고 그 결말에 어울리는 과거가 나중에 편집됩니다.
마치며
☐ 성공한 회사의 역사를 계획으로 읽고 나면
- 장기 계획을 세워서 10년짜리 그림을 그리고 멋지게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.
☐ 하지만 일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.
- 매일매일이 문제의 연속이고 닥치는 대로 해결하다보면 그 중 하나에서 기회가 생기고 매출이 오르게 됩니다.
-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순서대로 말하면 그럴듯해 보이게 되죠.
☐ 저는 아직 10년짜리 그림이 없습니다.
- 앞으로도 생길 것 같지 않습니다.
- 다만 오늘 처리해야 할 문제는 분명히 있습니다.
- 그걸 묵묵히 진행할 뿐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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