슬기로운 마음생활

나는 나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가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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☐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『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』라는 책에서 부처님 말씀이 이렇게 인용되어 있습니다.

“항상 너 자신부터 시작해야 하느니라”

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연민하려면 애정의 방향을 내부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.

  • 하지만 저는 그 시작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.
  • 남에게는 어지간하면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넘어가면서, 정작 저 자신에게는 그 여유를 주지 못했습니다.

“사람들은 흔히 스스로를 너무 부족하다고 여기는 탓에 자신에게 연민을 베풀지 못합니다.”

☐ 맞는 말 같았습니다.

  • 그런데 맞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게 살아지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.

남 탓과 자책은 반대가 아닙니다

☐ 저는 업무에서 실패하면 두 가지를 동시에 합니다.

  • 먼저 밖으로 이유를 찾습니다.
  • 상황이 안 좋았고, 정보가 부족했고, 저 사람이 제때 움직여 주지 않았습니다.
  • 다 사실이기도 합니다.

☐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제 안으로는 저를 두들깁니다.

  • 내가 못 하는 거다.
  • 내가 부족한 거다.

☐ 한동안 이게 모순이라고 생각했습니다.

  • 남 탓을 하면서 동시에 자책을 하는 건 앞뒤가 안 맞으니까요.
  • 관대하든가 엄격하든가 둘 중 하나여야 할 것 같았습니다.

☐ 지금은 다르게 봅니다.

  • 두 행동은 반대가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.
  • 둘 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두지 못하는 상태입니다.
  • 밖으로는 이미지를 방어하고 안으로는 처벌합니다.
  • 방향만 다를 뿐, 실패를 있는 그대로 놔두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.

☐ 정말로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은 굳이 남 탓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.

  • 실패를 인정해도 자기가 무너지지 않으니까요.
  • 남 탓이 필요하다는 건, 그만큼 실패가 자기 존재를 건드린다는 뜻입니다.

자책은 겸손이 아니라 확신입니다

☐ 책 제목이 “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”입니다.

  • 나티코가 승려 시절 배운 문장이고, 판단을 확정하지 않기 위해 쓰는 말입니다.

☐ 그런데 저는 이 문장을 밖으로만 씁니다.

  •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는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여지를 둡니다.
  • 상황 판단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.
  • 하지만 정작 저 자신에 대해서는 쓰진 않습니다.

☐ “내가 부족하다”는 매우 강한 판단입니다.

  • 여지가 없습니다.
  • 다른 건 다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 판단만큼은 절대 틀릴 리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.
  • 자책은 겸손해 보이지만 실은 확신입니다.
  • 그것도 검증해 본 적 없는 확신입니다.

☐ 앞에서 말한 모순의 정체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.

  • 남 탓과 자책은 서로 반대되는 두 태도가 아니라, 판단을 확정하려는 하나의 습관이 두 방향으로 새어 나오는 것입니다.

그런데 자책은 실제로 효과가 있습니다

☐ 여기서 흔한 결론으로 가면 이렇게 씁니다.

  • “그러니 자책을 그만두고 자신에게 관대해집시다.”

☐ 저는 그 말이 잘 안 먹히는 이유를 압니다.

  • 자책은 아무 쓸모 없이 붙어 있는 습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.
  • 제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결과물 중 상당수는 자책이 밀어붙여서 나왔습니다.
  • 마감을 지키게 했고, 대충 넘어가려는 걸 붙잡았고, 다시 보게 만들었습니다.

☐ 그러니까 자책을 놓는다는 건 지금까지 저를 움직여 온 엔진 하나를 끄는 일입니다.

  • 안 되는 게 당연합니다.
  • 놓으면 무너질 것 같으니까요.
  • 자신에게 관대해지자는 조언이 잘 안 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.
  • 그 조언은 자책을 비용으로만 계산하고 그것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을 계산에 넣지 않습니다.

확인할 방법이 없는 믿음

☐ 다만 한 가지 짚어둬야 할 것은 자책이 저를 움직여왔다는 판단은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.

☐ 자책하면서 성과를 냈다는 건 분명합니다.

  • 하지만 자책 때문에 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.
  • 자책 없이 해 본 적이 없으니 비교할 대상이 없습니다.

☐ 게다가 자책하는 사람은 성과가 나면 그 공을 자책에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.

  • 자기 능력이나 축적된 경험에 돌리면 자기 평가가 올라가는데 그게 익숙하지 않으니까요.
  • 그러니까 자책이 엔진이었다는 감각 자체가 자책이 만들어낸 것일 수 있습니다.
  • 반증할 방법이 없으니 계속 유지됩니다.

☐ 저는 여전히 자책이 엔진이었다고 느낍니다.

  • 다만 그 느낌이 증거는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.
  • 이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.

두 덩어리를 분리하는 일

☐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는 자기 연민 연구에서 ‘과잉동일시’라는 개념을 씁니다.

  • 실수를 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‘나는 실수 그 자체’라는 데까지 가 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.
  • 사건을 자기 존재에 대한 판정으로 번역하는 겁니다.
  • 이 개념이 유용한 건 문제가 되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 주기 때문입니다.

☐ 피드백을 받아들이고 고쳐 나가는 일 자체가 고통스러운 건 아닐 겁니다.

  • 고통스러운 건 그 과정에 자책이 동승해 있기 때문입니다.
  • ‘이 방식은 틀렸다’와 ‘나는 부족하다’가 한 덩어리로 붙어 오니까 무엇을 배울 때마다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.
  • 배우는 것이 손해가 되는 구조입니다.

☐ 네프의 연구 결과 중에 자기 연민이 높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.

  • 이들은 실수에 대한 걱정은 적으면서도 높은 기준과 자발성은 유지합니다.
  • 또 다른 연구에서는 자기 연민을 자극받은 사람들이, 과거의 부정적 사건에서 자기 몫의 책임을 인정하되 대조군보다 부정적 감정은 덜 겪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.

☐ 즉 관대함과 책임은 맞바꾸는 관계가 아닙니다.

  • 오히려 관대함이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줍니다.
  • 인정해도 무너지지 않으니까 인정할 수 있는 겁니다.
  • ‘너 자신부터 시작하라’는 말이 순서를 뜻한다면 그건 자기부터 챙기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를 감당할 수 있어야 나머지가 가능하다는 뜻일 겁니다.

주문이 필요한 이유

☐ 저는 자책이 올라올 때 “그럴 수도 있지”라고 되뇝니다.

  • 실패 직후만이 아닙니다.
  • 언제든지 올라옵니다.

☐ 한동안은 이게 부끄러웠습니다.

  • 주문처럼 문장을 외워야 한다는 게 아직 제대로 안 됐다는 증거처럼 느껴졌으니까요.
  • 제대로 된 사람은 그냥 자연스럽게 되는 거 아닌가 싶었습니다.

☐ 지금은 그게 형식에 맞는 대응이라고 생각합니다.

☐ 자책은 논증으로 오지 않습니다.

  • 근거를 갖추고 오지 않으니 근거로 반박되지도 않습니다.
  • “이번 건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”고 아무리 따져 봐야, 다음 순간 다른 건으로 옮겨갈 뿐입니다.
  • 특정 사건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상시 돌아가는 배경 처리 과정이기 때문입니다.

☐ 그렇다면 대응도 상시여야 합니다.

  • 반복되는 문장 하나를 꺼내 쓰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.

☐ 그리고 “그럴 수도 있지”는 자책을 없애는 말이 아닙니다.

  • 두 덩어리를 분리하는 말입니다.
  • 실패는 그대로 인정하되, 그것이 저에 대한 판결로 번역되는 지점에서 한번 끊는 겁니다.
  • 판단에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 “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”와 같은 구조입니다.
  • 다만 방향이 안쪽입니다.

☐ 17년을 수행한 사람도 이런 종류의 문장을 계속 꺼내 써야 했습니다.

  • 그렇다면 이건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필요 없어지는 보조 도구가 아니라, 원래 그렇게 쓰는 물건입니다.
  • 매번 다시 꺼내 쓰는 겁니다.

☐ 저는 아직 저 자신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.

  • 다만 자책이 올라올 때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연습은 하고 있습니다.
  • 작은 노력 하나가 나중에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.

SPELL QUEST · 문장 수선공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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