
“스프레드시트는 도구이지만 세계관이기도 하다. 다시 말하면, 숫자로 본 현실이다. 스프레드시트로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컴퓨터에 만들어내는 가상의 비즈니스가 말 그대로 가상이라는 중대한 사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.”
- 스티븐 레비, 「A Spreadsheet Way of Knowledge」(1984)
- 제리 멀러,『성과지표의 배신』에서 재인용
☐ 스프레드시트는 회사에서 쓰기에 정말 적합한 도구입니다.
- 가로세로에 숫자를 넣으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야기가 한 화면 안에 정리됩니다.
- 셀 하나를 바꾸면 아래 숫자가 전부 다시 계산되고, 그 결과를 놓고 다음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.
- 무엇보다 누가 말했는지가 지워집니다.
- 팀장이 넣은 숫자든 막내가 넣은 숫자든 셀 안에서는 똑같이 생겼고, 틀렸으면 똑같이 틀린 게 드러납니다.
- 회의에서 이만한 도구는 없습니다.
☐ 그래서 회사의 거의 모든 논의는 결국 표 위로 올라옵니다.
- 사업 계획도, 인력 계획도, 마케팅 성과도 마지막에는 셀 안에 들어갑니다.
- 숫자로 치환되면 비교할 수 있고 비교할 수 있으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.
☐ 그런데 위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조금 반발했습니다.
- 숫자로 보면 세부를 놓친다는 말은 워낙 많이 들어서 거의 상투어처럼 느껴졌거든요.
- 게다가 정확하지도 않습니다.
- 스프레드시트는 세부에 약한 도구가 아닙니다.
- 오히려 사람이 육안으로는 절대 못 보는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봅니다.
- 그러니까 위험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.
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 됩니다
☐ 스프레드시트가 놓치는 건 작은 것이 아니라 숫자로 번역되지 않는 것입니다.
☐ 이탈률 15%는 셀에 들어갑니다.
- 그런데 고객이 결제 버튼 앞에서 잠깐 망설였다는 사실은 들어가지 않습니다.
☐ 이직률은 셀에 들어갑니다.
- 그런데 그만둔 사람이 들고 나간, 어떤 문서에도 적혀 있지 않던 판단들은 들어가지 않습니다.
☐ 재구매율은 셀에 들어갑니다.
- 그런데 그 고객이 왜 다시 왔는지는 들어가지 않습니다.
☐ 문제는 이것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점입니다.
- 표는 그 자체로 완결돼 보입니다.
- 빈칸 없이 다 채워져 있으니까요.
- 표를 놓고 회의를 하다 보면 표에 없는 것은 언급될 자리가 없습니다.
- 빠졌다는 사실 자체가 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.
가정과 결과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
☐ 그리고 여기가 진짜 위험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.
☐ 모델의 맨 윗줄에는 보통 가정이 들어갑니다.
- 월 성장률 8%, 이탈률 3%, 객단가 2만 원 같은 것들입니다.
- 이 중 어떤 숫자는 지난 6개월 데이터에서 나왔고, 어떤 숫자는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.
☐ 둘은 근거의 무게가 다른데 셀 안에서는 똑같이 생겼습니다.
- 같은 폰트, 같은 굵기, 같은 정렬입니다.
- 그 숫자들이 수식을 통과하고 나면 결과는 이렇게 나옵니다.
- 12개월 뒤 누적 매출 4억 3720만 원.
☐ 입력의 불확실성은 계산 과정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출력의 정밀함만 남습니다.
- 정밀함과 정확함은 전혀 다른 것인데 자릿수가 늘어나면 사람은 그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.
☐ 레비가 “가상”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 화면입니다.
- 근거는 흐릿한데 결과는 선명한 상태 말입니다.
숫자는 회의실에서 반박당하지 않습니다
☐ 회의에 두 사람이 들어옵니다.
- 한 사람은 “요즘 고객들이 좀 불편해하는 것 같습니다”라고 말합니다.
- 다른 한 사람은 “재구매율이 12%에서 9%로 떨어졌습니다”라고 말합니다.
☐ 두 사람이 알고 있는 정보의 양과는 무관하게 회의는 두 번째 사람의 말로 진행됩니다.
- 앞사람의 말은 “그건 느낌 아니냐”는 질문을 받습니다.
- 뒷사람의 말은 근거를 요구받지 않습니다.
- 숫자가 이미 근거의 형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.
☐ 이 차이가 반복되면 조직의 공용어가 숫자로 정리됩니다.
- 사람들은 회의에 들어오기 전에 자기가 아는 것을 숫자로 번역해 옵니다.
- 번역되지 않는 것은 틀렸다는 판정을 받는 게 아니라 아예 발언되지 않습니다.
- 도구의 한계가 조직의 인식 범위가 되는 셈입니다.
☐ 앞의 대목이 표가 무엇을 담지 못하느냐의 문제였다면
- 이건 사람이 스스로 ‘표에 담기는 것만’ 말하게 되는 문제입니다.
그다음에는 사람들이 숫자를 관리하기 시작합니다
☐ 멀러가 책 전체에서 하는 이야기가 이것입니다.
- 측정되면 평가에 쓰이고, 평가에 쓰이면 목표가 되고, 목표가 되면 사람들은 그 숫자를 만드는 데 최적화됩니다.
- 측정 지표가 목표가 되는 순간 그것은 좋은 지표이기를 그만둡니다.
☐ 현장에서는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.
- 상담 응대 시간을 관리하면 그 상담을 빨리 끊습니다.
- 문제가 해결됐는지는 지표에 안 잡히니까요.
☐ 월말 매출을 관리하면 다음 달 물량을 당겨씁니다.
☐ 어느 쪽도 거짓말은 아닙니다.
- 다들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일한 결과입니다.
☐ 이때도 스프레드시트는 아무 문제 없이 작동합니다.
- 목표 달성 셀은 파랗게 표시되고 그래프는 우상향합니다.
☐ 화면 속 회사는 좋아지고 있고 실제 회사는 나빠지고 있는데, 화면만 보고 있으면 그 둘이 벌어지는 걸 알아챌 방법이 없습니다.
그래서 표를 덮자는 이야기냐 하면
☐ 아닙니다.
- 대안도 없고, 감으로 하는 경영이 낫다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.
- 멀러도 지표를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.
- 지표가 경험에 기반한 판단을 보완할 때에는 유용하고, 그 판단을 대체하려 들 때 문제가 된다고 말합니다.
☐ 숫자는 현실의 요약이지 현실이 아닙니다.
- 요약은 원본보다 다루기 쉽기 때문에 어느 순간 원본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.
- 화면 속 회사가 아무리 건강해 보여도 망하는 것은 언제나 화면 밖의 회사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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